대구, 구미 출장 산후마사지 봄날샵 8회후기
페이지 정보
작성자 무*한오소리51 조회13회 작성일 26-06-16 20:11본문
1. 노명자에서 노라노로(1928~1947) 1928, 서울 종로구 내수동 부자 차녀, 남동생 대건이. 외할아버지는 이학인, 이은전하의 영어교사로 직접 전화상대. 만주에서 세관일하고 엄마 일본유학보냄. 엄마 16살 때 외할아버지 사망. 외할아버지 70장의 양복과 외할머니의 저고리, 브로치를 보면 두분 다 멋쟁이. 엄마는 한국최초의 아나운서 이옥경. 외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외할머니 37. 인천으로 이사. 어머니 일본유학중 다시 인천으로 와 인천여고에 입학. 경성의대 일본남학생과 약혼 중에 아빠 노창성(만주소학교 동창) 도쿄 구라마애공업전문학교에서 총독부관비생으로 유학중에 엄마수필보고 찾아옴. 조선인으로서 서로 이해할거라 생각해 결혼. 일본청년은 이옥경의 불행보면 가만안 있겠다 경고 후 아버지 빈털터리 때도 돕고 엄마의 평생친구로 지냄. 외할머니는 또래 여자애, 9살 여자애, 행랑아범을 내 보호자, 감시원으로 둠. 9살 오남이언니는 내가 원하는 뭐든지 해주려 함. 내가 불때며 소꿉놀이할 때, 인력거 타던중 엄마보고 뛰쳐가 잃어버렸을 때 당황하던 모습들 회상. 오남이언니 부평으로 시집, 고생심했지만 이후 개발로 부자됨. 내가 좋아했던 음식싸들고 서울로 나보러 옴. 나는 어릴 때 용호라는 남친있었음. 부유했지만 파산후 하던 인쇄업도 파산, 미국갔다가 김포공항에서 만남. 속눈썹 개발 후 생산, 수출하다 재판에 서게된 것을 내가 도움. 이후 나에게 노라노속눈썹으로 공급. 외할머니 밑에서 지내다가 서울 2층 양옥에서 살게 됨. 동네에 유명한 사람 많음. 소현세자 이왕후손들, 남작, 민대감, 여운형선생 살았음. 우리 집은 앞마당연못, 아코디언모양 철제문으로 알려짐. 마당보려면 성냥가져와하니 애들 줄서서 놀람. 나는 어릴 때 조용했지만 9살쯤 끼가 나타남. 옷 물려입는거 불만 없지만 오간디원피스 사줄 때 부러웠음. “내것도 사주지 않으면 자르겠다”하고 자르자 엄마는 조용히 언니와 내 원피스 사서 입힘. 방송국일 하던 아빠 때문에 라디오소리 지겨워짐. 아빠는 생활이 어려운 작가들 도왔음. 어느 일요일, 엄마는 막내 임신 후 7개월째 마포가려고 전차갈아타다가 닫힌 문에 뒤로 넘어져 다리전차밑에 들어가 절단. 그와중에도 엄마는 “내 여우목도리”하고 외침. 강인함. 부민관에서 최승희의 춤을 봄. 최승희 오빠가 최승희를 일본유학보내고 현대무용배운 뒤 돌아와 안막과 결혼. 미국, 프랑스 다녀와 한국 전통무용 공부하고 춤으로 유명. 10대 때 본 보살춤 아직도 기억남. 무대의상과 독특한 율동, 이국적인 음악. 1930년 말 어떻게 대담한 옷과 공연을 펼쳤는지 놀람. 주말새벽 장보고 청소한 뒤 점심시간에 백화점식당이나 아서원 중국요리점 가서 외식, 인사동 서커스봄. 첫 영화는 뚱뚱이와 홀쭉이주연의 천국여행. 집에 돌아오면 재료로 아빠가 스키야끼해줌. 아빠가 벌주는 이유 딱 두 개. 거짓말, 집에서 일하는 사람과 불우한 사람 괴롭히는 것. 대건이가 집에서 일하는 아이들 때렸을 때 혼남. 영하 15도 외할머니 방에 불땔 때도 안부름. “나도 하기 싫은데 누가 하겠니”. 경기여고시절, 문학소녀. 이와나미문고라는 책이 나의 모든 지식. 유명배우 브로마이드를 붙여두고, 야시장에서 사교댄스교습서 사서 피아노연주 부탁해 연습. 본정에서 레코드듣고 일요일 가사필사, 노래배움. 외할아버지 친구 아들인 베드로아저씨가 의대생으로 짐옮길 때 각종 배우잡지, 이젤, 목탄, 도화지 두고 갔고 여기서 영향받음. 아저씨 의사됨. 폐질환 앓던 신부와 결혼해 이북생활. 미완성교향곡, 말타에켈트의 노래 즐김. 보도연맹 학생품행단속으로 극장출입불가. 시험기간 영화관에 안경과 하이힐 신고 약초극장 미인초라는 영화 보다가 옆에 미술선생님 앉아계신거 보고 들킬까봐 일주일 걱정함. 봐주신 것 같음. 미술시간 동물들 그림에 학교 선생님얼굴 그려넣었는데 미술선생님이 웃음. 일본예법시간과 수예시간에 손다친 척 책을 읽었는데 나중에 앉아있는게 힘들어서 다리 붕대감고 꾀병. 친구들이 눈치챔. 여운형선생집은 학생들로 늘 붐빔. 여운형선생무릎베고 자고 다같이 수영도 감. 선생 둘째 때 딸이 여연구. 나와 친했음. 한강 스케이트장 개장때 남학생이 내코트에 편지 집어넣었는데 내가 당황해 찢자 나를 건방지다하며 괴롭힌 남학생이 내가 선생집있을 때 찾아옴. 선생이 잡아서 훈계 후 무릎꿇고 사과. 이후 저격당해 돌아가심. 2차세계대전 막바지 1944, 일본유학금지. 관부연락선 침몰, 이화여전과 숙명여전폐교, 지도원양성소생김. 남학생은 학도병, 여학생은 군수공장과 정신대로 끌려가자 양갓집자제들 혼담이야기 쏟아짐. 그때 퇴역한 육군소좌집안 중매들어옴. 도쿄 고덴바 육사 엘리트미남. 밤새 하얀 물방울무늬 치맛감으로 감색펠트모자제작, 하이힐 신고 사진찍어 보냄. 24살 나이너무 어리다 거절하다가 내 사진 보고 승낙. 인사편지 마무리 하이쿠답장, 감동. 헌병이 가족에 대해 한달동안 조사. 조선인이 일본장교와 결혼하려면 과정이 복잡. 서울에 10일만 있을 수 있음. 그때 한 뭉치 받은 편지에 육군대위가 어떤지 모르고 시집오는 것에 안타깝다. 노력하겠다 적힌 거 압박감느낌. 시집날 폐백올리고 며칠뒤 일본 고덴바 시골마을 도착. 살림살이 안해봐서 신랑이 숯과 신문지에 불붙여주자 밥짓고 김구워 저녁밥먹음. 담날에도 엉성하게 차렸는데 두시간넘게 안 옴. 잠들었는데 신랑이 출장명령있으니 비밀로 해달라하고 브랜디 이별주로 마시고 나감. 눈물. 아침에 집집마다 난리남. 이틀 뒤 기차탄 장교 34명주 살아남은 사람 2명. 각종 부인회에서 위로하고 감. 시집후 10일째일. 요코스카항구도시에 있으니 남편면회오라함. 어디에도 남편 없음. 고덴바귀가. 미군기가 도쿄폭격중. 한달 뒤 다시 시즈오카로 오라함. 남편이 봉투건네줌. 봉투에 편지, 일기장, 예금통장있음. 사실 요코스카에서 나를 마주쳤으나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시집와 생이별할게 두려워 그냥 갔다는 내용. 연락없이 부대에서 사흘 술만 마셨다니 용서할 수 없음. 귀국하려하니 육군중좌 부인이 나를 만찬대접하고 양녀로 지내면 안되나 했지만 귀국함. 송별사 낭독, 증명서(남편 대위의 아내로서 귀국하니 헌병을 편의보장해라)받고 돌아감. 관부연락선에 남자가 짐 뺏어 지하선실로 데려감. 행적묻더니 이동경찰이라면서 수색, 증명서 보더니 태도 바뀜.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무고한 사람 수색하지마라” 귀가후 황해도 시댁집갔으나 시부모 안좋아함. 자신이 전쟁터가면 아내 자유롭게 해달라는 아들이 마음에 걸려서. 엄마가 남편 오키나와 엽서전함. 시엄마에게 그소식 전하니 엄마한테 먼저이야기 해야지하며 역정. 시동생, 시누이, 시아빠 술상과 도시락 다 내가 새벽에 차림. 아빠가 참다못해 나 시골요양보낸다고 빼냄. 외할머니 보러 강원도 인제로 감. 지금은 이북땅. 신랑사진에 물떠놓고 기도. 1944 늦가을, 시엄마 막내낳아서 감. 큰 시누이가 집안 살림중. 미역국과 아기우유 구하고 기저귀세탁. 저녁에 술상과 아침 시누이들 도시락싸줌. 감기심해짐. 손톱 곪아서 빠짐. 7식구양 김장. 시엄마 기운찾자 엄마가 전화해서 다시 귀가. 강원도 외할머니댁 가서 쉼. 오키나와 미군도착소식 듣고 묵직한 봉투도착. 전사소식인줄알고 떨림. 내가 명예군인며느리 부적합하다고 통지옴. 엄마 앞에서 통곡. 육군소좌 남편 전사하면 보험과 위자료가 미망인에게 가니 이런 통보한 것. 오키나와 함락 후 소속부대전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2차세계대전 종결. 1945 서울 만세소리 들림. 일주일 뒤 시댁에서 잊고 다시 시작하자 편지왔으나 무시. 이남 이북으로 갈리고 항일운동한 사람들 공산주의자와 합세하기도. 데모와 정치 치열. 이웃집 여운형, 장덕수, 백범김구 암살당함. 이승만체제로 가는 중. 인플레이션가속. 아빠는 이화여전 갈 길마련하고 미군에게 사위생존여부 묻기도 함. 부모님 사기당해 돈날리고 양옥집에서 신당동으로 이사. 과부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구미출장샵 이화여전 소문날까 독학으로 공부하는데 타자기 쓴 적이 없어 군부대다니던 대흥이에게 타자기 빌려달라고 시킴. 흑인병사가 타자기 빌려줘서 밤새 쓰고 돌려줌. 3개월 뒤 영문타이핑해서 보건후생부 취직. 첫월급 엄마주고 전차표, 커피값받음. 한국 도시락냄새 심해서 밀전병싸감. 바이올린과 세련된외모의 취직에 도움준 미스터남 우리집 하숙. 그가 예쁘고 육감적인 린다와 그레이스 데려왔는데 동양의 파리 상하이의 직업댄서임을 알고 파리에 대한 동경심. 린다, 그레이스는 아편중독으로 사망. 미스터남은 미국교수되 미국인과 결혼. 1946 늦은저녁 남편왔다는 소식 들음. 멍하니 쳐다보다 현관으로 가니 마르고 어색한 미소의 남편 봄. 오키나와에서 죽을고비 넘겼고 어느 일본여인이 구해줘 살다가 미군들이 조선인은 고향으로 돌려보내준다 들어 귀국. 이상하게 눈물도 흐르지 않고 이혼이야기 어떻게 꺼낼지만 생각중. 시댁의 편지 남편에게 주고 읽음. 담날에도 암말 안했고 4일째 남편 부모집으로 돌아감. 아빠가 친정, 시댁에서 반반씩 지내는거어떠냐 희생하기로 했지만 시아빠간섭에 잔소리, 남탓하는거 듣고 이제 안되겠다고 결심. 헤어지기로 함. 결별후 오히려 적극적이고 명랑해짐. 미군피엑스일 승낙. 영어실력테스트 실패했지만 솔직한 점 때문에 채용됨. 외국인미용실통역맡음. 후랫업 몰랐던게 기억남. 그때 미국배우들이 납작하게 올린 머리 한거 보고 무사통과. 월급 두배지만 도시락싸다님. 레스토랑가서 밀전병도시락먹자 사람들 쳐다봄. 남편은 시부모 등쌀에 시달리는 중. 시댁이 화난 점은 사경헤매던 아들을 붙잡고 사흘동안 돌려보내지 않은 것. 아들이 부탁해 며느리 다시 받아드린다지만 관계회복불가임을 양가 모두 앎. 남편과 나 서로 생각하지 않고 잘못회피반복. 왜 남편은 일본인 여자와 지낸이야기, 나는 시부모 잘못만 이야기 했나. 어느 일요일 우리집 어른들 모여있을 때 남편이 이혼하자고 하고 할머니한테 뺨맞음. 구청에서 이혼서류제출 후 명동 냉면집에서 밥먹고 다시는 군인되지 않겠다고 약속함. 그래서 늦게 한국군입대했고 출세도 늦어짐. 한 파티에서 노신사 스미스가 비서로 일해달라함. 타이핑 잘 못하는점과 독립해야하는 상황설명. 채용됨. 사무실에서 밀전병과 커피마실 때 들어왔다가 당황하니 다시 나가서 햄버거, 프랜치프라이, 아이스크림 사줌. 노동조합부위원장 장씨가 집회열 때 쓰는 트럭 준비해주면 간장도매표 줄테니 그걸로 장사하지 않겠냐 부탁. 대건이와 친구가 사업 시작. 내 월급 2000원인데 첫 장사 수익이 1300원. 부자됨. 할리우드 인기헤어스타일도 하고 양식당도 감. 천향각 해방후 호텔됨. 천향각사장 고 김옥교여사가족과 우리가족은 친한 사이. 김여사집에 외국인 로스테탐있었음. 오스트리아인으로 마카오 무역업종사중. 테탐은 나를 뒤밟아 천향각아들 김익호에게 자리마련 부탁한 것. 이혼 후 남자는 무관심. 테탐이 찾아와서 택시타고 중국요리점 가는데 택시기사 요금 두배불러 테탐이 싸우는 사이에 슬쩍 빠짐. 나는 미국유학. 30년 뒤 미국 출장 돌아오니 테탐명함과 19살 내 사진놔둠. 일본 갈 때 테탐에게 전화검. 요코하마에서 달려옴. 좋아했냐 물으면서 사랑했었다고 옛이야기하고 돌아감. 미스터스미스 은행관사 파티준비 맡김. 테이블세팅, 칵테일준비, 좌석배치, 네임카드작성, 통역. 파티참석해도 된다는 이야기 듣고 파티매너와 교양 습득. 옷도 맞춰야해서 엄마 치맛감, 일본인 기모노로 칵테일드레스와 이브닝드레스 만들어 입음. 내가 주장하는 것은 누구나 시간만 주어지면 옷, 요리 뭐든 만들 수 있다는 것. 전문가는 제한된 시간에 같은 수준으로 만들어야하는게 다를뿐. 재무국장 부인 배여사가 할리웃거주하는 멋쟁인데 내 드레스에 관심보임. 내가 만들어입는다 하자 패션디자인 길은 어떠냐하며 그때 내 운명 결정됨. 미스터스미스가 내 유학을 위해 추천서 받아줌. 앤테일러 거래업체인 스포츠웨어 타박오브캘리포니아가 승낙. 미스터스미스 현지파트타임일하며 학교다니게 해줬는데 비자가 문제. 월급받는 경우 노동청허가 있어야하는데 6개월동안 비자 안나오자 상원의원 롤랜드에게 도움요청후 3주만에 받음. 비자명은 on the job training, 직장내 교육. 그 후 군비행기개조한 거타고 노라로 이름지은 뒤 미국으로 떠남. 2.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1947~1954) 시애틀4시. 비자(on the training), 문제로 입국불가상황. 이민국관리사무소에서 전화걸어 비자에 대해 알아보더니 금요일 오후 5시 나 수용소보냄. 돈내고 미스터스미스에게 전보쳤음. 될대로 되라하며 철창방에서 잤음. 담날 외국여성 두명과 대화(멕시코인들 불법입국). 베사메무초 노래부름. 일욜아침 미국인 영일사전들고 찾아와서 로스엔젤레스 본사에서 왔다며 풀려날거라 함. 분홍 캐시미어옷과 초콜릿상자 받음. 롤랜드씨가 전화하자 이민국 뒤집어짐. 월욜아침 사과받고 풀려남. 로스엔젤레스 공항에서 한인회 사무실로 감. 노신사 호텔로 안내. 스폰서 미스터 타박만남. 몸매보더니 모델끼가 있다고 칭찬함. 손바닥 굳은살 없으니 굳은일 한 적 없는거 알아챔. 디자이너되려면 옷 만들어지는 과정 알아야되고 프랭크웨건기술전문학교 컨택해줌. 공장에서 배우면서 일하라고 함. 미국인 하나가 영화배우 할 생각 없냐고 물음. 동경조에 나올 일본여성 찾는 중, 상대 배우는 험프리 보가트. 토욜 스튜디오에서 사진찍고 생각보다 환상적이어서 놀람. 시나리오작가 짐이 에이전트와 상의, “당신은 갖출건 다 갖췄다. 마음가짐이 문제다.” 앨범에 가득한 일류배우들같은 모습에 기죽음. 노신사가 영화계 보다 패선디차인 계속할 것 권유. 이후 에이전트와 연락끊김. 컨트리클럽감. 크리스찬 디올의 뉴룩 골라둠(검정 타프타상의, 무지개색체크소매, 넓은 스커트). 쉬림프 칵테일 시키고 룸바춤추니 사람들 한국인인거에 놀람. 한때 한앤테일러회사 여사 아들 약혼파티때 머쓱한 일 있었음. 남녀 수영복 입고 버벌리힐스 테니스코트와 탁구대 정원있는 집에서 소박한 테일러여사가 눈에 밟혀 물마시러 집들어가다가 통유리에 머리박아 촌닭사실 증명한 것. 미스터타박이 내가 배우되는게 아니니 깔끔한 단발권유. 미국식평면재단(drafting)과 유럽식입체재단(draping)배우고 박물관고대의상을 교재로 배움. 미스터타박과 앰배서더호텔 패션쇼구경. 가을에는 로스앤젤레스, 봄에는 뉴욕. 관람객은 의류회사인드가 바이어들, 패션잡지기자들. 나만 동양인. 희귀하니 배우권유, 거절. 난 한국이 패션불모지라 고민. 250$ 37년산 시보레 자동차 구매. 미스터 타박 보험없이 차모냐며 꾸짖음. 난 미국사정을 몰라 결국 운전면허 땀. 유학생중 영어 못하는데 필기100, 실기 떨어지는 사람들 위해 통역돕고 곰국과 불고기 스테이크 먹여줌. 그러나 나중에 아무도 인사하러 안와서 섭섭. 카우보이 서부영화볼 때 누가 악역, 선역인지 보고 잠들면 권성징악으로 끝나는 것을 보고 위로받음. 어른들 한인회 안창호선생자제 영화배우 필립안 소개시켜줌. 호남형은 아님. 비벌리힐스거주, 자가용3대 중 빨간 스포츠카 있었음. 그와 친구로 수십년 지냄. 쿵푸 드라마로 인기얻음. 왜 미스터리와 결혼하지 않았냐할 때 난 친구라고 이야기. 2차 세계대전막바지 신문1장 가지고 가족 돌려봄. 가난하지만 항상 조국은 한국임을 기억. 예전 로스엔젤레스에서 롱비치 가려면 유전 지나가야 했는데 텍사스, 캘리포니아 근처 유전 많은걸 생각하니 한국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듬. 우리가 일본에 피마자기름 제공한 것 생각하면 일본은 패전할 운명이었던 것 같음. 그러나 물질은 오래 가지 못함. 캘리포니아 거주중인 동생 대흥이 오일쇼크로 이웃들과 카풀하는 것 봄. 귀국하면 조국발전에 기여하자고 결심. 포켓북 영문소설 읽으며 실력 높아짐. 칵테일 파티 한 남자가 담배와 칵테일 권하자 ‘“난 보이들과 대화하지 않고 맨하고만 대화한다” 받아침. 난 더 이상 마네킹 같은 존재가 아님. 어느 누구에게도 내가 이혼녀라는 구미출장샵 사실 말 못했는데 피팅모델 지니가 약혼 2번 후 파혼, 지금 약혼자는 유대인이라 부모님 반대가 심하고 부모님 반대가 심하다고 사정 털어놓음. 내가 이혼녀라는 것을 털어놓자 지니는 무표정하게 오히려 남자들은 연애경력이 많을수록 흥미있어한다고 함. 동서양 사고차이가 큼을 깨달음. 한일에 대해 책임지고 살아가면 그만. 디자인실 샘플메이커(봉제사) 헝가리 출신 이름 소피. 재킷 앞단 단추 잘못달아서 앞부분이 울자 공개망신시킴. 회사 제품 팔리지 않아 대책논의중 타박조수인 조이가 에이스인데 나 나가있으라고 함. “너는 내 보스 아냐. 미스터타박만 명령할 수 있어.” 이후 미스터 타박이 나 호출함. 사장실 들어가자 간부들 쳐다봄. 사무실 비우겠다 하고 점심 스파게티 먹으며 생각중. 미스터 타박말하길 조이 별명은 빌어먹을놈이야. 난 인턴사원주제에 회사 도움되는 조이에게 화낸 것을 반성하고 사과함. 최고참 디자이너 스텔라 관두자 난 자주 관두는 디자이너 되지말자고 결심. 패션계 게이들 많은데 제임스도 게이. 노라 너 춤출 줄 아니, 주말에 뭐하니, 음식시켜놓고 안먹으면 안되지. 등 아직도 그 의도가 궁금함. 내가 남자처럼 생겨서 그런 걸까? 너 새로온 디자이너 어떻니? 나는 디자이너 자질도 중요하다고 생각. 일류가 아니면 관두겠다. 최고참 스텔라 술 마시고 가봉할 때 취해서 모델 움직인다고 회초리 때린 것, 게이 제임스 모두 패션계 이끄는 사람들. 미국은 옷만드는 모든 공정 분업화. 디자인실은 디자인, 소재결정, 봉제실에 패턴 넘기기. 나머지는 각 부서에서 알아서 함. 공장 각 부서 돌아가서 공정경험함. 파워미싱(바느질), 프레싱(다림질), 기본기 다뤄둔 덕에 혼자 의상 50벌 1시간 반만에 다릴수 있었음. 그 다음 패킹(포장), 한국은 여순 사건발생. 아빠가 광복절에 인수한 제약회사 부도나서 살림살이 차압. 내가 뉴욕여행중 모은 돈과 간장도매업 수익 부치고 귀국준비. 미스터 타박말하길 중국은 이미 마오쩌둥이 적화통일했고 한국은 북이 남침할 것. 여기를 벗어 나지 말라했지만 귀국. 서울 상공 초갓집들 보이자 눈물. 예전 그대로지만 마음가짐만 바뀜. 전 상사 미스터 스미스 보러감. “벌써 디자이너 폼이 나는구나.” 사무실 비서 페기와 친구됨. 거리에서 동창 경운이 만나 양장 사이즈 재고 내 방 반을 작업실로 꾸민 뒤 옷만들어줌. 경운이는 이화여대 국문과 전국 대학생 시쓰기 1등.“ 나랑 문학하자”, 경운아 난 돈벌어야 해 문학애기 하지마. 경운이는 있는 집 외동딸이자 수재. 그러나 부모님 돌아가시고 연극감독과 결혼, 남편이 이북끌려가던 중 죽음. 주말에 페기와 놀며 파티드레스 만들어줌. 모두가 드레스 어디서 샀냐며 물어본다고 주말에 미군장교 부인들 상대로 의상실 열라고 추천. 서울 이름난 남성복 봉제사들 데려다가 여성복 가르치고 개업준비. 오전 10시 손님들 맞이하고 사이즈 잼. 밤늦게 패턴그리고 가봉, 의상 제작. 봉제사 조춘용 선생 완벽. 의상 한 벌당 10달러 받았는데 당시 명동의 10배. 부끄러워서 아는분께 회계맡김. 디자인 선배 코래라 패턴 못뜨고 있을 때 나는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하다가 배고파 집가려고 알려줌. 손님이 베이지색 캐시미어 기모노소매 디자인 코트 주문. 문제는 어깨에서 떨어지는 소매각도 관건. 광목으로 실험후 코트감 재단대 위에 깔아둠. 옷감 가격 무려 200달러. 재단사 두려워 했지만 내가 자름. 이후 인도대사부인의 사리느낌 이브닝드레스 제작. 사교회에서 내 디자인 알려져 파티에도 초대. 와인색 바탕, 초록색 공작무늬 7부 드레스 입고감. 국빈으로 온 모스크바 주재공군 장과 만남. 이후 저녁식사 초대 내가 거절. 둘째 동생 덕자 서울 발레단 입단. 나는 발레의상 담당. 인어공주공연. 연극인들이 인도 간디 느낌의 의상주문. 유엔 인도대표에게 인도 전통의상빌림. 허리에 천두르고 옆선 여러번 접어서 남는 여유분으로 머리싸는 형태. 연극당일 검열에 걸려 시나리오 편집, 공연복필요. 10가지 새틴안감 5마씩끊고 룸바의상제작. 간디공연 흥행, 한국전쟁으로 중단됨. 1950년 여자들 계모임 곗돈 내고 담날 남침으로 피란길 오름. 멀리서 탱크 삼팔선넘어 남하중. 이승만 국준전투연설, 미군이 지원하니 두려워 하지 말라. 얼마 뒤 아빠가 전화받고 엄마와 동생들 깨워 밥 짓고 루비목걸이, 개버딘 스커트, 단화, 화장품 집안물건들 가지고 트럭 한 대에 타서 서울역 기차탐. 미군들과 우리 가족 부산도착. 돕기 위해 육군병원가서 부상병들 돕고 마취약, 페니실린 등 약품 구하러 다님. 의학 공부한 것 처음으로 후회. 9월 마산까지 밀고 내려옴, 유엔군 인천 상륙. 인민군 도망,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감. 서울갈 준비중 중공군이 다시 남으로 밀고 내려옴(1.4후퇴) 부산 민사처병원에 두 다리 동상걸린 여자애 마취없이 다리절단. 곁 지키던 짐 휜클 소령. 이후 부산떠나 대구로 감. 미군의 중고전축, 레코드판 사서 노래부르며 지냄. 신응균장군(전남편)과 만남. 나중에 보기로 하고 헤어짐. 토욜 지프차 타고 신장군 집으로 옴. 시동생은 행방불명. 이집 하숙하기 원했지만 거절. 서울 신당동으로 돌아갔는데 집에 벼룩창궐. 미군이 DDT뿌려줌. 쌀 한가마니와 신문벽지로 집구색이 남. 명동에서 지인 유정희 가수 만남. 미군 장교 클럽 무대의상제작의뢰. 재단하고 재봉틀하면 동생 현자가 마무리. 가세 안정. 키스오브 파이어 부르는 날 겨자색 드레스 제작하고 간단한 통역까지 해줌. 긴장해서 다 틀리고 다시 부름. 전쟁 1년 지나도 삼팔선 전투 지속. 퇴계로 2층 빌딩 50평 중 1/3은 공장, 나머지 매장으로 꾸밈. 한국은행 간부들 부인 3명 의상제작 의뢰. 딸들도 내고객되어 친구처럼 지냄. 산부인과 이옥경 여사도 타이트 스커트 제작해주자 수십년간 최고의 고객됨. 남성복 기술자들 여성복 기술 알려줌. 미국 NBC 방송 취재 원함. 홀에서 미니 패션쇼 열고 소문나서 불청객 때문에 패션쇼문 잠금. 쇼트팬츠, 브라톱, 재킷, 이브닝드레스등. 동아일보에 전쟁 뒤에서 여자들 날뛴다고 기사냄. 아마 쫓겨난 기자일 것. 아빠 왈 이름 알리는게 더 중요하니 그런 비판에 흔들리지 마라. 이혼도 한 내가 뭐가 무서우랴. 다른 누군가가 내 이름 도용해 양재학원 세운 것도 신경안씀. 1950년대 정신 적 고통으로 춤, 노래탐닉. 김해송의 KPK 쇼단. 이난영 남편 작곡의 천재. 박단마 의상담당. 금방 친해지고 팝송가사 통역. 감정표현 표시. 원래 노래, 영화, 극 좋아해서 재미. 박단마 라이브 위해 빨간 벨트, 검은 드레스, 구슬과 갓 제작. 무용가 진수방 카르멘에서 겹프릴 스페인풍 스커트와 케스터내츠가지고 춤췄던 것 기억. 돌연 두명은 미국으로 떠남. 수도재탈환 후 화폐개혁, 포로들 피살. 아낙네 아이 북송 막으려고 눈물로 호소. 내 퇴계로 부티크 성장. 이해랑, 김동원, 최은희, 내가 무대의상 제작. 왕비 황정순 의상제작위해 미군 무기포장지로 깃제작. 오델로 장군 옷 미군담요 타프타로 망토 제작. 무대 의상제작이 나에게 큰 공부. 신협 유치진 은장도 무대의상 의뢰. 사극의상 제작위해 중국사료에서 겨우 제작. 여배우 지퍼, 바이어스재단처리해서 물결치게 제작. 임춘앵 국악단 본부로 초대받아 감. 마루위에 양단, 뉴똥, 새틴 등 비단 가득. 맘껏 써서 행복. 그러나 임춘앵씨 고증 벗어난다며 반대, 밀어붙여 그대로 진행시킴. 비단들은 아줌마 팬들이 보낸 것. 남주인공 임춘앵 인기 치솟음. 1953년, 서울 종로사거리 부티크 옮기고 일반손님도 받자 진상손님들 많아짐. 엄마가 회계 봐줌. 아빠가 위암판정으로 6개월 시한부, 택시 탈 비용 아껴서 아빠에게 일식, 중식 사주고 양식코스요리 만들어 줬지만 먹는 양 줄어듬. 5일장 치루고 내가 27살에 소녀가장 됨. 3. 도전으로 세상을 디자인하다. 1945 폐션계 샤넬이 71살 컴백. “남자들이 여자는 직업생명이 짧다고 해서 돌아왔다.” 내가 한가지 아쉬웠던 구미출장샵 것은 파리에 가보지 못한 것. 프랑스어 선생 구하고 주3일 2시간 일찍 일어나 프랑스 공부, 10개월 뒤 아카데미 줄리안 미술학교 초청장 받음. 미화 5천 달러(집 두채 값) 가지고 떠남. 8시간 비행뒤 홍콩, 파리 도착. 중간에 비행기 놓쳐 2일 동안 테헤란에서 머물 때 한국 남성과 대화. 독일로 음악공부 하러 가는 중 이름 윤이상. 호텔에서 잠들고 윤이상은 오전 6시 호텔 떠남. 윤이상 선생은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 한국에 압송 됐다가 독일에서 망명, 1955년 죽음. 춘향전 대신 심청전을 남겼지만 고국에서 공연 못함. 파리 도착 후 개선문~ 가로수길 걸으며 생각. 한국 영사관 가서 이수영 영사 만나고 줄리안 학교 입학수속 마침. 대학생 아이린 과외받으니 프랑스어 잘하게 됨. 오페라, 발레, 연극관람. 루브르 박물관 구경. 예술가 모이는 중국 식당에 추천. 서울에서 L여사도 봄. 샹젤리제 거리 아메리칸바가 아지트. 오뜨꾸띄르 구경도 하고 발렌시아가쇼 샘플 입기도 함. 디올쇼 피팅룸에서 디테일도 연구. 니나리찌쇼에서 벨벳모자 주문 뒤 가봉해서 씀. 그 외에 심지쓰는 법, 어깨패드 다는 법, 스퀘어 네크라인, 보트네크라인 뜨지 않게 하기 등. 내가 아는 낭만 있는 까페, 아기자기한 부티크 있던 샹젤리제 거리는 없고 대형 명품매장 가득. 나는 꼬리제 까페 좋아했음. 세대 관련없이 할머니 핑크연지 찍고 티타임 갖는 것이 매력적. 내 발렌시아가 수트와 흰색 린넨과 레이스 챙있는 모자+ 흰 대나무 핸드백, 흰장갑과 코 뾰족한 하이힐 신고 거리로 감. 파리의 동양여자 드물어 칭찬. 너무 좁은 치마 폭에 신호가 바뀌어서 교통경찰이 경고. 롱샹 경마장은 샹류층이 많이 오는 곳인데 처음으로 프렌치 디너 처음 먹게 됨. 내가 레스토랑 일할 때 있던 일을 서빙하는 청년에게 얘기해줌. 프랑스와인, 쁘띠 스위스 치즈 등 나의 벗. 야외 경마장에서 모자, 화려한 드레스 입고 구경. 100프랑 내고 베팅한 말이 이겨 400프랑 범. 퐁텐블로 궁전 관광까지 1박 2일 보냄. 여름철 파리시민들 두달동안 바캉스 떠남. 나도 스페인 여행하고 남프랑스~스위스 둘러봄. 불문학 공부중인 유학생 무슈박 같이 감. 조건으로 대접하는 술 마시지 않고 내가 한쪽눈 깜박이면 몰래 빠지라고 함. 중식당 모임에서 한국은 실력있어도 인정받기 어려운 사회임 공감. 비즈니스맨이 마드리드에서 만나자 하며 헤어짐. 스페인 여자애가 준 소세지 넘 맛있어서 스페인제 살라미 무조건 구매. 은행 환전할 때 은행원들 동양 여자 구경나옴. 미스터 L 빠에야 집 데려갔는데 지구 반대편 음식이 너무 한국입맛에 맞아서 놀람. 이후 투우 보는데 소에게 창꽂는 것 보고 공포스럽고 위험하다는 생각이 듬. 황소가 투우사 들이받아 실려나갔는데 다시 들어와 소 미간에 창 꽂고 끝남. 마드리드 패션은 파리, 뉴욕에 비해 뒤쳐짐. 경제가 불안정해서. 입생로랑, 발렌시아가 모두 스페인 출신인 것 과는 거리감. 오늘날 젊은 디자이너들의 스타일은 모두 발렌시아가 스타일. 플라맹코 보는데 최고 가수, 영화배우 프랜크 시나트라 들어와 앉음. 웨이트리스들에게 팁주고 입구에서 장미 2개 사서 나에게 줌. 눈치줘도 무슈박 빠져주지 않아서 결국 아쉽게 헤어짐. 미스터L의 권유로 바르셀로나에서 마요르카 섬으로 감. 안익태 선생(애국가 작곡자)보려고 2박 3일 지내며 한국 실태에 대해 묻는데 이런 대접 받을 사람들 대우 소홀해 안타까움. 소녀들에게 금목걸이, 금팔찌 주고 작별. 좋아하던 쇼팽 휴양지 마요르카 각별함. 처음 이탈리아 로마에는 한국 영사관 없었음. 아는 사람 없이 여행사 통해 관광감. 로마 시내 유적들 1000~2000년, 무지함에 한탄. 성 베드로 성당, 바티칸 도서관 천장화, 미켈란젤로 계단 등 환상적. 근위병 유니폼이 30년전 것임을 보고 가슴 벅참. 미켈란젤로 디자인에서 변형된게 없음. 카라칼라 노천극장에서 아이다 공연 본 뒤 극장으로 감. 문화충격. “교황, 마피아 공종하기에 이런 예술가들 생긴 것.” 예술이란 안정된 곳에서 나오는 게 아님. 검정 금실용무늬 옷 입고 가이드 안내받으며 클럽에 도착. 클럽 영화 모정의 Love is a many splendored thing흘러나옴. 잘생긴 가이드가 춤 권유하고 유명까페 가서 차 마시니 새벽 2시 내일 연락달라 했으나 호텔 옮기기로 하고 잠듬. 1956년 서울로 귀국. 외국에서 너무 많은 것 배워 한국에 어떻게 펼칠지 고민. 경제 도움되기 위해 한국산 옷감만 쓰기로 함. 패션계 오뜨꾸뛰르 넘어 레디투 웨어, 대량생산체제지만 유럽만 맞춤복 패션중심. 미국 실용성과 유럽 고급짐 가미한 노라노만의 옷만들기로 함. 고려모직 옷감 만져보고 너무 뻣뻣해 의심스럽지만 열정넘치는 사람들 믿어봄. 아쉬운 은 방모사만 있고 소모사의 디테일과 섬세함이 없음. 견직물은 한국에도 많지만 한복원단이라 양장에 어울리지 않음. 색만 비슷하게 맞춤. 가봉은 모델있어야 해서 고민, 부티크 고객에게 부탁. 패션쇼 맞는 걸음걸이, 치수 등 준비 들어감. 일반인들에게 티켓 판매후 패션쇼 시작되면 불청객 쫓아냄. 연주는 박춘석씨와 사회 이진섭씨. 한국 첫 패션쇼에 감격해 눈물 나올 뻔. 1953년 오드리 햅번 스타일이 부상. 디자인은 지방시. 미국 할리우드 여배우들 전세계로 퍼져나감. 그레이스 켈리의 재킷 벗을 때 블라우스 뒤판 푹 파인 것이 매력적. 1954 최은희의 꿈, 조미령 교차로 의상디자인. 단종애사의 엄앵란 등 많은 여배우 의상 제작. 엄앵란, 김지미는 한국 영화계의 쌍벽인 여배우들. 최은희씨의 춘희 의상디자인함. 나와 신체 사이즈 같아서 바쁠 때 내가 모델로 가봉. 김지미의 양귀비 제작대 도금봉의 천하일색 양귀비 제작해서 경쟁. 김지미씨가 우리에게만 의상제작해 달라고 10만원 들고 찾아옴. 처음 전속계약. 사극 의상 재봉흔적 보이지 않게 바느질. 양귀비 흥행. 주연배우 움직임 생각해 디자인, 배우보다 의상 먼저 눈데 들어오면 실패. 내 패션쇼 미녀들은 배우 진출하기도(이빈화, 문혜란, 남미리)1958년 미스코리아 대회 주관중 의상문의. 오금순씨 걸음걸이, 무대매너, 서양식 식사예절 등 지도함. 한국일보 사장이 경비반 부담할테니 미국까지 가서 도와달라하자 거절. 사프론(보호자) 정식 고용하고 모든 비용 부담해주기로. 미스코리아 끝났지만 한국여성이 국제대회에서 미모, 몸매로 겨루기 어려울 거란 생각이 들어 안타까웠음. 내년 미스유니버스 대회 위한 계획 세움. 남동생 대흥이가 이화 여대 정치인 오위영 딸 오현주양 찾아옴. 미스코리아 진 선발. 보도부장에게 “대학 재학중 대회 참가한 것은 미인임을 알리려는 것이 아니라 한국전쟁으로 고국의 왜곡된 이미지 바로잡기 위해” TV출연 후 사진 찍고 개회식 때 자기소개. 현주양 한복에 푸른 롱드레스, 분수모양 구슬 족두리와 빨간 장구. 현주가 큰절하자 시장이 행운의 열쇠 지급. “나는 큰 선물 드렸는데 시장은 왜 작은 선물 주냐.” 사람들 웃고 할리우드에서도 전보 여러장 옴. 일반이 투표상, 포토제닉에서 현주 뽑힘. 수영복심사에서 탈락 미스 유니버스는 안타깝게도 일본. 할리우드 수지 웡의 세계 주연 테스트. 주인공은 중국인 창녀. 상대 배우는 윌리엄 홀트. 배역이 창녀역이라 식구들 반대. 1950 디올의 버티컬 라인, 튤립라인, H라인으로 실루엣 트렌드 변화. 1957 발렌시아가 슈미즈드레스 유행, 디올 죽고 입생로랑 후계되며 젊은이 중심 심플 패션 시작. 3.15반대하는 학생 데모 시작, 4.19 혁명 뒤 이승만 하야. 이기붕 부인 내 부티크 와서 봄코트 재활용원함. 이승만 하와이 망명 윤보선 취임. 5월 쿠데타 박정희 주도. 세상에 놀랄일 많음. 서울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 10명의 여배우 참석. 모두 나에게 옷 의뢰, 30벌 넘음. 가봉 2시간씩 24시간 쪼개 일함. 글래머 여배우 김혜정까지 제작의뢰. 나는 부산 민사처 병원 짐 휜클소령과 재혼. 10년만에 중령달고 구미출장샵 나를 찾아 청혼. 행복했지만 서로에 대해 몰라 갈수록 힘듬. 1963년 명동 14평 3층 건물 사옥 장만, 사생활 점점 힘들었고 짐과 하와이 가서 살기로 함. 쇼룸, 패션숍 열고 한인 협회 후원으로 패션쇼 염. 사무실엘리베이터 두 여자기자끼리 대화. “한국에서 온 패션 디자이너래, 전에도 한국 디자이너 쇼 갔는데 옷, 구두색도 못맞추더라.” 짐, 나 두 여기자와 저녁먹어도 분위기 풀리지 않음. 아마추어 모델 쓴다는 것에 질책하자 나도 인내 한계에 도달.“ 하와이 낮에 모델, 밤에 훌라춤추는게 안 잊혀져서요.” 두 기자 연락없더니 사진 찍기 위해 의상 3벌 의뢰. 옷 보더니 기자가 감탄. 하와이 지역신문 패션 인터뷰 1면에 실림. 티비쇼에서도 패션쇼 성공적으로 마침. 나를 미스 하와이 선발 심사위원으로 추천, 하와이 서머클래스 특별 강사로 추천. 하와이는 다들 전통의상 무무만 입어 운영이 쉽지 않음. 미용실 소개로 부유층 고객 소개받음. 하와이 봄, 가을 1년에 두 번 패션쇼 개최. 후원해 주는 부인 만남. 2천달러 수표 써주며 후원 보탬. 부인은 같은 디자인 다른 색으로 3가지 의뢰. 디자인은 좋은데 색이 질리니까. 부인이 저녁 초대에 진주고 수입상있으니 진주목걸이, 브로치 하지 말아달라함. 그녀 남편은 한국산 고집을 높게 평가해줌. 한국 가면 옷을 저렴하게 공급해야 겠다고 생각. 하와이 정착 2년 뒤 짐이 귀국거절해 이혼. 1966 한국와 기성복 제작, 백화점에 오픈함. 맞춤복 단점은 실제 입을 때 차이가 있다는 점. 당일 패션쇼 후 모델 입던 기성복들 모두 팔림. 한국에도 기성복시대 열림. 나는 인기 티비프로그램 의상협찬과 의상 노라노 자막 담. 첫 협찬은 내 멋에 산다 전향이씨. 그 외 강부자, 여운계, 사미자, 윤여정, 윤소정도 내 의상 협찬. 나에게 큰 도움준 것 은 윤복희씨. 영국 깡마른 모델 미니스커트 유행할 때 한국은 윤복희가 처음 초미니스커트 입고 공연. A라인 드레스와 칼라, 커프스로 깃세워 키커보이게 연출. 지방시가 오드리 햅번 이미지 만든 것과 비슷. 두 자메 블루룸 나이트클럽에서 일한다며 모델로 추천. 펄 시스터즈 판탈롱(나팔바지)로 인기. 미국 목화아가씨 선발, 면직물 판매촉진홍보. 목화아가씨와 의상 십여벌 보내 한국에서 패션쇼 하기로 함. YMCA건물 신축 위해 모금하고 있어 기부하는 대신 행사진행인력 요구. 한국 면직물 사업은 첫 국산 모직 받아 봤을 대와 다르게 발전함. 한국 면직물 사업 첫 국산 모직 받아봤을 때랑 다르게 발전. 모델도 뽑아서 첫 직업패션모델 생김. 1등 당첨된 사람이 변자영. 독특한 마스크와 늘씬한 몸매. 미국에서 본 데님이 한국에서 보이자 매우 기쁨. 색상과 디자인 재가공해서 데님옷 개발. 펄시스터즈와 윤복희 진행 도움. 1971 두 번째 한국 처음으로 양쪽에 대형스크린 설치 코튼 개발 공로상과 YMCA 감사장 받음. 4. 열정창조자, 패션 패셔니스타 1971 코코샤넬 88세 사망. 샤넬은 전쟁 미국 방문당시 지하철로 시외곽에서 출근하는 여성들 보며 71세에 컴백. 일하는 여성 위해 디올은 미디, 맥시 내놓는 때 단정, 평범 A라인 검정재킷 디자인.패션계 실망했지만 6개월만에 전역에서 유행. “옷입고 달리고 걷지 못하면 의미없다.”, 나에게 럭셔리란 잘 만든 옷 5년 이상 입을 수 있는 것. 노라노 컬렉션 보러 오는 10~50년 단골들 보며 공감. 내가 90살까지 일하면 샤넬 앞선다. 샤넬은 레종 도뇌르 최고훈장 받음. 코트라 요청으로 견직물 프레타 포르테 패션쇼 참가. 한국은 겨울 누에길러 팔고 견사는 일본 수출중, 코트라는 그걸 옷을 만들어 팔기를 원함. 도예가 김여사 실크에 대해 해박해 농민 돕기로 함. 국산 모직, 국산 면직, 견직물까지 여성복 소재로 개발. 350벌, 2만달러 수출계약 성사. 우리나라 최초 하이패션 수출. 3개월 이내 납품 추석날까지 나와 일하며 도움. 최고참 조선생이 추석날 일하겠다 도움. 대한잠사협회 해외 시장 개척 공로상 받음. 뉴욕 백화점 부사장, 바이어, 실무자와 만나 가격 협상하다 추가 주문 하지는 않기로 함. 뉴욕 타임스에도 한국 실크 기사 실림. 내가 만든 사이즈표가 얼마뒤 미국 뉴스탠다드 됨. 한국 일보 미스 유니버스 기사에 각별함 느낌. 외국 패션잡지에서 그 해 미드나잇 그레이 유행한다하자 사놓은 옷감과 동대문 회색 코트지 동남. 한국일보에서 10회짜리 패션 야화집 제작. 6회에서 톱리스, 시스루, 9회 광부청바지, 11회 복장사와 에로티즘 등 중국패션추월이야기함. 유럽은 가슴, 일본은 여성 목덜미, 한국은 발이 섹시포인트. 1974 신세계백화점 사장 우리 매장 찾아옴. 내 기성복 코너열기 바랬음. 80점 넘는 의상, 20명 모델과 패션쇼 성공적. 패션쇼도 자주 열림. 변자영, 김나영 모델계 이끌어 감. 임예진양과 안인숙양 청춘스타 쌍벽. 젊은 세대 홍보 위해 신촌 대학가에 디자인 다르게 하고 가격도 10% 낮게 개업. 이화여대생들은 나의 평생 고객들로 남음. 잠사협회 미국시장 바이어 초청해서 패션쇼 개최 권유. 예산 부족해 상공부장관에게 부가가치증가 강조하며 10만달러 수익내는 조건으로 2만달러 따냄. 10만달러면 50달러 짜리 2천벌 팔아야 함. 실크 단가비해 비싸 원단 재단이 중요. 염색과 프린팅도 까다롭다. 50벌 패션쇼 준비해 두고 모델 8명 고용. 미국 3대 패션 평론도 절제된 멋이라 표현. 남프랑스의 루이부부가 초대해서 버건디 와인 페스티벌 간 적 있음. 인당 100달러 10명 모임. 허허벌판에서 흰 천막 길게있고 테이블 100개, 노래 흘러나옴. 코스 요리 나오고 코냑으로 마무리. 저녁은 호텔에서 먹음. 신선한 버터, 바게트. 까페오레. 3월엔 와인케이브 시음회 갔고 나를 위해 과일주 주기도 함. 1978년 홍콩 최은희 실종사건 큰 충격. 그녀를 위해 많은 의상 제작했고 친분 있었기 때문. 누군가 청초함에 반해 신감독과 납치했다는 소문. 뉴욕 맨튼 7번가 노라노 간판 걸고 쇼룸 준비. 미국 패션공부부터 여기까지 30년걸림. 뉴욕 바이어들 700벌 주문. 홍보물 제작에 더 공들여 독특하니 버리지 않고 보게 만듬. 뉴욕 메이시 백화점 1층 쇼윈도 15개 모두 노라노 의상. 5번가 부티크에서 율 브리너가 옷 사감. 랩 드레스 히트쳐서 전 미국 으로 팔려감. 복제품까지 생김. 삭스백화점과 노드스트롬 백화점 쌍두마차. 노드스츠롬 바이어들은 직접 발로 뛰며 물건 찾음. 세련되고 신선한 디자인 입점하는 세비코너들어가서 10년 유지. 다른 회사 기한 3달인데 우리는 한달 정도로 맞춰 추가주문 가능하도록 함. 로스엔젤레스 조셉 매그닌 백화점 3천 벌 주문. 우리는 한 매장만 고집해서는 안되도록 한달에 1000벌씩 3달 거치게 함. 안팔릴 때 재고 싸이면 곤란하기 때문. 염색 프린트 공장에서 생산, 뉴욕으로 보냄. 1979 박정희 피살. 김대중 사형 선고. 한국 수출 실적 200억 달러. 봉제 공장관리인 송문호 선생 유능함. 재봉사 100명 채용, 월 생산량 3000벌 이후 밤에 포장작업. 그 와중에 노라노 복제품이 뉴욕 7번가에 공공연히 팔리는 것 봄. 우리만의 특수 프린트있어야 겟다고 생각. 반월 공장 세우고 국산 기계 사서 이광복 실장과 공장설계, 파리로 시장조사 감. 삭스 배화점 5층 정식 노라노 매장 생김. 봄/여름, 가을/겨울, 리조트 홀리데이 웨어로 1년 4번씩 노라노 제품 판매. 직장여성인들 점심먹은뒤 허리가 끼기 때문에 치마 뒷고무줄처리 한 것이 많이 팔림. 블루밍데이즈 백화점 노라노브랜드 2년간 판매 1위. 세계 스케줄 여러개 잡혀 돌아다니다 파리 도착. 빈 방이 없었음. 400달러 주고 호텔방잡고 노바파크 감. 아침 샴페인과 식사까지 하니 700불 청구. 주로 아랍인들 묵던 호텔. 보그에 디자인 실리며 주문 쇄도. 프리사이즈 오버재킷과 단색팬츠 한 벌로 만든 것. 대중적이라 많이 팔려나감. 약속 기일 지키고자 한 것이 큰 핵심. 구미출장샵 미니 패션쇼 후 대화 나누는 이벤트 했고 금발 백인이 베이지색 어울리는 것 확인. 한국은 색을 잘 쓰지 않고 선을 더 잘씀. 버선, 한옥처마 등. 환갑오자 선상 파티 계획. 남동생이 준비. 45명과 함께 선실에 2명씩 묵기로 하고 좋은 식사와 푸른 바다, 멕시코 둘러보며 칵테일 파티. 60촛불케이크 썰며 보냄. 1988 홍콩 거래처로 중국 처음 감. 한국원단은 값싼 중국에 경쟁되지 않음. 봉제, 프린트 회사도 옮겨감. 중국 남쪽 샤우싱 중국 섬유 생산 중심지. 오래된 공장과 먼지 보고 실망. 두 번째 공장도 싸구려 블라우스라 실망. 세 번째 고급 실크 제품 박음질 하는 곳과 협상. 중국은 여성과 아이가 봉제 공장에 같이 출퇴근 하는 것을 보고 한국 고급 인력 경단 현상 안타까움. MBA 조카와 처를 파리 보애 파리시장 진출하기로 했지만 외국인이 회사설립어렵고 프랑스 시장 좁아 유럽전체 공략해야 해서 포기. 마치 지는 해같아 도쿄, 뉴욕 홍콩의 활기가 없었음. 그래서 일본 시장 공략하기로 함. 얼마 뒤 걸프 전쟁 시작됨. 일반 주문 많지만 백화점은 없었음. 일본 패션감각이 보수적, 국제 수준과 괴리있음. 실크는 습기 많은 일본에서 인기 없음. 1990년 40년 된 명동도 시간이 지나자 퇴색. 마이카시대 오자 주차 어려운 명동 떠나 압구정 로데오 쪽 청담동 사옥 매입. 지하 층에서 패션 쇼도 할 수 있게 설계. 1991 남북 여성대회 북한 대표 여연구 최고 인민회의 부의장옴. 여운형 둘째 딸, 우리 앞집 살던 사이 설렜지만 만나지 않고 곤란해질까 중국에서 볼려 했지만 얼마뒤 연구 죽고 후회. 한국일보 장명숙씨 명자 만든 옷이라며 이야기하자 나를 보지 못해 아쉬워 한 소식 전함. 연구 언니 난구 일본 의상학교 다닌 사람. 연구 동생 원구만이 지금까지 생존. 원구는 가장 미인. 연구가 쓴 나의 아버지 여운형 읽고 추억 새록새록. 새벽 집 앞 중학교 담 넘어 철봉 걷다 떨어지고 운동장 모래 밭 방학 숙제 같이 한 것 등 추억이야기 할 시간 없어 씁쓸. 남에서 태어남 감사. 1992 근로자 764만 중 40% 여성. 가파른 인건비 상승. 국제 경쟁력 약화. 섬우, 의류 수출 쿼터제로 어려움. 하이 패션업계 바늘구멍 통과 수준. 나는 쿼터제 없는 실크 , 마, 비스코스 자연 소재 취급했음. 봉제기지 중국으로 옮겨서 다행. 소재고갈은 디자이너 손묶는 것과 같음. 세계 탈공업화, 정보화 시대 진행중. 고급 부티크 문 닫고 글로벌 회사 오픈(자라, H&M). 디자이너는 디자인으로 승부봐야 하지만 세계 흐름을 잘 읽어야 함. 주문 생산 시간 단축, 실크 소재 대중화, 프린팅 디자인과 기술 업그레이드 등 내 결실들. 뉴욕 쇼룸닫고 청담동만 남겨둠. 어느날 불쑥 전남편 신장군 2년 마다 오다가 왜 오지 않는지 의문. 신장군 부부 함께 암치료 하다가 부인 사망, 남편 투병 시한부 2년 소식 들음. 처음 설렘, 이별, 엇갈림, 이혼 내 모진 행동이 상처 된 것은 아닐까 처음 생각 듬. 그가 세상 뜨기 전 마음 풀어주기로. 처음 결혼 결심~모질게 대한 이유 등 솔직하게 적어 편지 쓰고 앞으로 한 번씩 점심 먹기로 함. 그 후 매달 같이 남편 좋아하는 음식 위주로 먹음. 중국 게 맛있게 먹은게 기억. 병세 악화되고 4일 뒤 사망. 노라노 재팬 설립 7주년. 일본경제 거품 꺼지며 패션 불황, 철수. 인생 결정중 가장 후회했던 것은 일본시장 관련 된 일. 미쓰이 상사 동업중 소사구야 유통판매, 노라노디자인샘플, 미쓰이회사 투자 맡음. 첫 컬렉션 성공하자 돌연 노라노 패션 대신 하디에임즈로 바꾸자고 했고 승낙. 이게 가장 후회. 일본유통업계 노하우 못배워서. 이후 하디에임즈의 우리샘플 복제품 보고 얕은 속임수 보여서 쓴웃음. 한국도 IMF로 대출금리 30%, 세금증가, 인건비 증가. 마음 먹고 청담동 임대로 돌리고 3층만 매장으로 꾸밈. 직원 축소, 규모 축소. 여전히 손님들 찾아와 감사. 1990년 연극계 활기. 강유정 뮤지컬 마스터 클래식 의상 내가 제작. 히트침. 강유정씨와 오랜 인연 연극만 위해 살던 것 높이 평가. ’나, 김수임‘의상의뢰. 나는 진짜 김수임 알고 있음. 따뜻하고 잘 챙겨주던 사람. 이후 간첩혐의로 사형된 소식 들음. 아들이 공연보러 귀국. 미국 입양, 목사됨. 밝고 순수해 다행, 대화 기억하려 경청해 둠. 친아빠는 자신을 아들로 인정하지 않아 볼 수 없었다함. 김대중 취임하고 부인 이희호 여사 위해 옷 여러벌 가지고 청와대 감. 노란색, 원피스, 앙상블 등 단정, 산뜻한 스타일 선호. 옷을 잘 입으려면 안목있어야 하고 몸매 좋아야 하며 tpo맞춰야 함. 어느날 블라우스 똑같이 제작해달라고 찾아왔는데 알고보니 영부인 의뢰라 벙찜. 박정희 부인이 외출복 없어 육여사 찾아온 것도 기억남. 옷 입으면 외출하는 줄 알고 아들 박지만 찾아옴. 제주도 양들로 트위드 코트 제작. 신부님과 처음 개발한 원단. 육여사가 입으니 돋보임. 이후 육여사가 신응균 장군 부하가 박정희였다고 알려줌. 교황 바오로 2세 방한. 한국 실크로 천주교 옷 만들어 주려다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 포기. 대신 비단옷 드리기로 함. 장신부님 덕에 교황님과 축복받고 대화나눔. 10년뒤 현자는 천주교인 됨. 외할아버지도 천주교 믿었음. 대건이 죽기 전 영세 받음. 우리도 영세 받기로 함. 동창 지영이 대모부탁. “너 꿈 꾼거 있니?” 검은 색 웨딩드레스 입던거 기억나긴 해. “수녀님들이 검은옷 입더라.” 안정감 느낌. 84세 박기훈 신부님이 영세. 8년간 미사 참여. 겸손한 마음으로 살기로 함. 브라운 도서관 경기여고 후배 진경희 일하는 중. 방문할 때 카렌 교수 만나니 로드아일랜드 디자인 스쿨 강연 해달라 해서 즉석 강연. “패션디자이너로 성공하는법?” MBA출신과 결혼해라. 특히나 재무관리가 중요하다. 이후 경희와 연락. 성공한 한국 여성 미국에 자랑하고 싶으니 정년퇴직기념으로 강연 해달라 함. 전문자에게 원고 맡겨 부탁하지 않고 점심 먹은 뒤 대학생들 디자인 봐줌. 무대의상은 배우 움직임, 조명색에 따른 차이, 배우돋보이게 하기 등 이야기 함. 나이 지긋한 교수들과 학생들 강의실에 앉아있을 때 강연 시작. 내 삶에 대해 질문하고 답해줌. 대가 바라지 말고 한 번 해보자는 도전으로 시작해 열심히 하면 누군가 돕는다 전해줌. 한 분야에서 반세기 일한 것 높이 평가해줌. 가난에 허덕이는 상황, 패션은 사치, 디자인 30년 경력과 운이 작용. 왜 업적 홍보는 거의 안했냐 그런 야망이 없었기 때문. 왜 후배디자이너들과 친하게 지내지 않냐 시간약속 지키지않아서. 이후 2000년 겨울 후배 디자이너모임“세계 패션그룹”대상, 기념품, 상금준다 할 때 고맙지만 해준게 없어 부끄러웠음. 단골 여성 고객들에게 감사. 장명수여사(여성최초 일간지 사장) 세레나 한여사(세계은행근무, 일부러 로스엔젤레스에서 들려 1년치 옷 사가기도), 정희경여사(이화여대 교장, 국회의원, 남북적십자회담 대표 활약), 이인호 여사(사학과, 여성최초 재외공관장), 이여사 한국 여류 명사 10명 초대해서 부시 대통령과 오찬 갖는 자리. 우리가 처음만난 것이 부끄럽다며 더 자주 교류 하자는 말 듣고 각 분야 지도자끼리 인사 없이 지낸 것을 반성함. 이태영 여성변호사와 교육계김옥일 이화여대 총장, 토지 작가 박경리 선생 모두 자랑스러움. 세계 대전 종전 서양복식 들어오기 시작할 때 할리우드 여배우들 패션 본따 각진어깨, 팬츠 선보임. 내 첫 패션쇼 이후 한국도 패션흐름 시작. 광복후 여러 옷들 관심 갖기 시작. 60녀대 배우 옷들 트렌드 74년 신세계 백화점에 노라노 브랜드 개점. 명동의 반도패션(LG패션) 의류 대중화에 힘씀. 보그, 바자, 엘르 등 유명 패션 잡지들 출간. 90년대 동대문 밀리오레 패션 떠오름. 그러나 2000년대 지나 패션계 활기 잃는 중. 젊은 이들이 컴퓨터, 여행 등에 빠져 옷에 관심 줄었기때문.



